역사책에 등장하는 왕과 왕비, 귀족들은 언제나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장군은 전쟁터로 나가며, 귀족들은 궁정에서 권력을 둘러싸고 경쟁한다. 하지만 궁정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하루가 정치와 전쟁으로만 채워졌을 리는 없다.
그들도 사랑에 빠졌다. 누군가를 질투하고, 몰래 만나고, 헤어지고, 다른 사람의 연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 은밀하게 시작된 사랑이 어느새 궁정 전체에 퍼진 소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유난히 잘 기억한 사람이 있었다. 16세기 프랑스의 군인이자 궁정인이었던 브랑톰이다. 본명은 피에르 드 부르데유. 그는 궁정에서 생활하고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왕과 왕비에서 귀족과 귀부인, 성직자와 군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접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그 기억들을 글로 옮겼다. 그가 남긴 이야기의 문을 열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16세기 프랑스 궁정의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왕과 귀족보다 사람을 바라본 이야기꾼
브랑톰은 어린 시절부터 왕실과 가까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이후 궁정 신하이자 군인으로 살아가며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을 여행했다. 그만큼 보고 들은 이야기도 많았다. 그의 관심은 역사에 남을 큰 사건에만 머물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부부 사이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여인이 연애 때문에 화제의 중심에 섰는지, 누가 사랑 때문에 질투하고 복수했는지 같은 이야기도 그의 기억 속에 남았다.
왕과 귀족의 사생활에서 이름 없는 남녀의 이야기까지, 브랑톰이 기억한 세계는 넓었다. 로마 교황과 추기경에 관한 일화까지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그런 까닭에 [프랑스 궁정 스캔들]에는 역사적으로 이름난 사람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실제로 보고 들은 이야기와 전해 들은 일화에 그리스·로마 신화와 고전에서 가져온 이야기도 어우러진다.
브랑톰은 그것들을 딱딱한 기록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려주듯 풀어냈다. 그 덕분에 수백 년 전 궁정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마치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옛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읽힌다.
‘뻐꾸기 남편’에서 시작되는 궁정의 연애 이야기
첫 장의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바람둥이 아내를 둔 뻐꾸기 남편들의 이야기.’ 브랑톰은 불륜과 질투, 사랑과 쾌락, 복수를 둘러싼 여러 일화를 펼쳐놓는다. 바람을 피우는 아내 이야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고,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자신의 생각도 거침없이 보탠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질문은 더욱 많아진다. 여인들은 왜 사랑을 찾아 나서는가. 몰래 하는 사랑과 드러내놓고 하는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사랑에는 어떤 예절과 기교가 필요한가. 사랑의 즐거움은 서로 접촉하는 데 있을까, 바라보는 데 있을까, 아니면 말을 나누는 데 있을까.
젊은 시절이 지나도 사랑에 대한 욕망은 남아 있는지,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들은 왜 용감한 남자에게 끌리는지, 남을 험담하는 일은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도 이야기한다. 마지막에는 이런 질문까지 등장한다. 유부녀와 과부와 처녀 가운데 사랑에 가장 뜨거운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날 독자의 눈에는 엉뚱하게 보이는 질문도 있고, 시대가 달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도 있다. 때로는 노골적이고 짓궂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브랑톰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기록이 된다. 그가 무엇을 궁금해했고 무엇을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여겼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16세기 궁정 사람들이 사랑과 결혼, 정절과 욕망을 바라보던 방식도 함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왕 마고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도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브랑톰의 이야기에는 역사책에서 익숙한 이름도 여럿 등장한다.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카트린 드 메디시스, 그리고 ‘여왕 마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프랑스 궁정 스캔들]에서 만나는 이들은 정치사의 주인공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브랑톰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이는 왕과 귀족의 모습보다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랑과 욕망, 부부 관계, 질투와 소문, 명예와 체면이 그의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부딪힌다.
멀리서 바라본 궁정은 화려하고 엄격하다. 왕과 왕비가 있고, 귀족들이 모이며, 신분과 예법이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한다. 하지만 브랑톰을 따라 그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사랑을 감추려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의 험담과 소문 때문에 명예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화려한 옷과 높은 신분 뒤에서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브랑톰이 바라본 궁정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스캔들 사이로 보이는 16세기의 생활
이 책에서 재미있는 것은 하나의 연애담이 또 다른 이야기로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여성의 동성연애를 이야기하다가 사랑의 예절로 넘어가고, 사랑의 쾌감과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서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되는 욕망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장에서의 여성과 사랑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험담과 중상모략, 명예와 복수도 등장한다.
과부의 생활과 재혼도 브랑톰의 관심을 피해 가지 않는다. 이렇게 놓고 보면 [프랑스 궁정 스캔들]은 단순히 유명인의 은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일화 사이에는 당시 사람들이 사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여성에게 어떤 정숙함을 요구했는지, 사랑과 명예가 어떻게 충돌했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브랑톰은 현대의 역사학자처럼 그것을 분석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 꺼내고,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또 다른 일화를 이어 붙인다. 때로는 고대의 사례까지 불러온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시대를 살펴보는 일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바로 그 때문에 사적인 일화는 뜻밖에도 한 시대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창이 된다.
궁정을 떠난 브랑톰에게 남은 것은 기억이었다
그렇다면 브랑톰은 어떻게 이 많은 이야기를 글로 남기게 되었을까. 1584년 그는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뒤 자신의 영지로 물러났다. 활동적인 궁정 생활에서 멀어지자 그에게는 이전과 다른 시간이 찾아왔다.
브랑톰은 자신의 영지에 머물며 젊은 시절을 돌아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궁정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이야기를 생생하고 재미있게 들려주는 재주가 있었던 그는 자신이 늙어간다는 것을 느끼면서 기억 속 이야기를 하나씩 글로 옮겼다. 책보다 자신의 기억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는 브랑톰 승원과 부르데유 가문의 저택, 샤토 투르 블랑슈와 리슈몽 저택을 오가며 젊은 날을 떠올렸고, 오랜 세월 자신의 글을 고치고 다듬었다. 그 시절에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브랑톰은 말하기를 좋아했던 여왕 마고를 찾아가곤 했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연설문을 번역해 함께 읽기도 했다. 마르그리트는 그의 글쓰기를 격려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젊은 날 궁정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모았던 사람이 이제는 서재에 앉아 사라져가는 시대를 글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한 시대의 구경꾼이 어느새 그 시대를 기억하는 이야기꾼이 된 것이다.
궁정의 웃음과 소문까지 역사로 남다
브랑톰은 161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글은 생전에 책으로 나오지 않았고, 훗날 [피에르 드 부르데유 씨의 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사후 출판되었다. 그 안에는 유명한 여성과 귀부인, 프랑스와 외국의 저명한 인물과 장군 등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프랑스 궁정 스캔들]에서 만나는 이야기 역시 그런 브랑톰의 기억에서 나온다.
물론 그의 글을 왕조의 공식 기록과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는 없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과 보고 들은 이야기, 당시 사람들에게 전해지던 일화와 고전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는 다른 종류의 역사가 남아 있다. 왕이 언제 즉위했고 어떤 전쟁이 벌어졌는지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생활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자신의 욕망과 체면 사이에서 고민했던 사람들. 남의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고, 소문을 퍼뜨리고, 그 소문 때문에 명예를 걱정했던 사람들이다.
왕과 귀족의 이름은 역사책에도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궁정에서 어떤 사랑 이야기를 나누었고, 무엇을 재미있어했으며, 어떤 소문에 웃고 화를 냈는지는 브랑톰 같은 이야기꾼이 없었다면 쉽게 사라졌을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까닭은 어쩌면 거기에 있다. 화려한 궁정의 문을 열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왕과 왕비, 귀족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사랑하고 욕망하고 실수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산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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