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원형경기장에서는 함성이 터져 나온다. 거대한 목욕탕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귀족들은 값비싼 옷과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황제들의 사생활에는 사랑과 욕망을 둘러싼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로마 제국의 한 장면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 뒤에는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때 검소하고 강인했던 로마인들이 제국의 번영에 취해 사치와 쾌락에 빠졌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면서 결국 거대한 로마 제국도 무너졌다는 설명이다. 과연 로마는 그렇게 멸망했을까.
독일 학자 오토 키퍼의 [로마 제국과 로마 성풍속사]는 이 익숙한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자는 로마인의 성생활만 들여다보지 않는다. 결혼과 가족, 여성의 지위, 간통과 이혼, 자유연애와 매춘을 살펴보다가 노예와 검투사에게 가해진 폭력으로 시선을 돌린다. 다시 종교와 철학을 지나 의상과 목욕, 춤과 연극으로 들어가고, 로마의 시인들이 노래한 사랑과 황제들의 사생활까지 따라간다. 그렇게 로마인의 삶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뒤 마지막에 다시 묻는다. 이 거대한 제국은 왜 무너졌을까.
작은 도시의 소박한 사람들은 어떻게 제국의 주인이 되었을까
책의 출발점에 서 있는 로마인은 화려하지 않다. 오토 키퍼가 바라본 초기 로마인은 농업과 목축을 생활의 중심에 두었던 소박하고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생활이 단순했던 만큼 생각과 가치관도 비교적 소박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론한다.
가족의 질서도 엄격했다. 초기의 로마는 남성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사회였다. 가족 안에서 남편과 아버지가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에서도 남편과 아내에게 같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혼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책이 소개하는 초기 로마의 법과 기록을 보면 아내는 남편과 자유롭게 이혼할 수 없었던 반면, 남편은 간통 등을 이유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다. 그만큼 가정 안에서도 남성의 권위가 강했다.
하지만 로마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영토가 넓어지고 전쟁과 정복을 통해 부가 쌓였다. 사회와 경제가 달라지자 사람들의 생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성의 삶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오토 키퍼는 이를 단순히 ‘정조에서 벗어난 여성들의 타락’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새로운 자유는 성생활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으며,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위치 변화와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설명한다. 제국이 변하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도 달라지고 있었다.
검투사의 죽음은 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을까
가정과 결혼을 이야기하던 책은 뜻밖의 장소로 독자를 데려간다. 원형경기장이다. 검투사들이 서로 싸우고, 들짐승과 인간이 맞선다. 관중은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벌이는 싸움을 지켜보며 열광한다. 오토 키퍼가 중요하게 바라보는 로마의 또 다른 모습은 바로 잔인성이다.
그의 시선은 아이들에게 가해진 체벌에서 정복전쟁으로, 다시 형벌과 고문, 노예제도와 공개 처형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마침내 대중이 모여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구경했던 투기장에 도착한다. 여기에서 [로마 제국과 로마 성풍속사]라는 제목만 보고 책을 펼친 독자는 조금 의아해질 수 있다. 성풍속을 다루는 책에서 왜 이토록 많은 분량을 폭력에 할애하는 것일까.
오토 키퍼는 로마 사회의 성을 다른 욕망과 분리해서 바라보지 않는다. 책의 서문부터 로마인의 민족성과 착취, 사디즘, 문화의 한계를 함께 다루는 것도 그런 시각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을 지배하는 힘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저자가 바라보는 로마인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원형경기장의 함성도 그렇게 로마 사회를 읽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비너스를 숭배하면서 스토아의 절제를 말하다
그러나 로마를 잔인한 제국으로만 이해하면 또 다른 모습이 빠져나간다. 로마인은 신을 숭배했다. 비너스는 그들에게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이었다. 그런데 책에 등장하는 비너스의 모습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명예로운 결혼의 수호자로 가문의 부인들에게 존중받는 동시에 매춘부의 여신이기도 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 민족의 어머니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리베르와 프리아푸스, 바카날리아, 키벨레와 이시스, 보나 데아의 이야기로 들어가면 종교와 결혼, 풍요와 성을 둘러싼 로마인의 생각이 더욱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종교를 지나면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스토아 철학이다. 스토아 철학이 그리는 이상적인 현자는 욕망과 감정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극단적인 행복이나 슬픔 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하고 삶의 유혹을 단호한 의지로 견디려 한다.
한쪽에는 사랑과 쾌락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금욕과 절제가 있다. 둘 가운데 하나만 로마인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생각과 삶의 방식이 하나의 제국 안에서 함께 존재했다. [로마 제국과 로마 성풍속사]가 보여주는 로마가 흥미로운 것도 바로 이런 지점이다. 로마는 한 가지 얼굴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회였다.
목욕탕과 극장에서도 로마는 살아 움직였다
오토 키퍼의 시선은 거대한 제국에서 다시 사람들의 일상으로 내려온다. 이번에는 옷과 보석, 향수와 목욕이다. 사람들은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보석은 아름다움을 꾸미는 물건인 동시에 사치와 권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로마의 유명한 목욕 문화도 등장한다. 책은 초기 로마인의 소박한 생활과 후대의 화려한 목욕 문화를 대비한다. 따뜻한 물에서 오랫동안 목욕하고 피부와 머리에 향수를 사용하는 생활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춤과 연극도 사람들이 즐기는 중요한 문화였다. 에트루리아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공연이 로마에 들어왔고, 아텔라네스와 마임, 팬터마임 같은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
이런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이름이 조금씩 작아진다. 대신 그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옷을 고르고 몸을 씻고 향수를 바르며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다. 전쟁과 정치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로마의 모습이다.
사랑은 법보다 오래 시에 남았다
책의 2권에 들어서면 로마인의 사랑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시인들이 길잡이다. 카툴루스와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티불루스, 프로페르티우스, 오비디우스 등 로마 문학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들의 작품에는 사랑의 여러 얼굴이 남아 있다. 카툴루스는 연애 시인으로 등장하고, 호라티우스에게서는 자유로운 사랑의 즐거움을 만난다. 프로페르티우스는 킨티아에 대한 열정과 이별의 고통을 노래한다.
오비디우스의 세계는 더욱 넓다. 다프네와 포모나, 나르키수스와 피그말리온, 신들의 사랑과 비극적인 연애 이야기가 그의 작품을 지나간다.
법률이 당시 사회가 사랑과 결혼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보여준다면 문학은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들이 사랑을 어떻게 상상하고 표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로마의 성풍속을 이해하는 데 시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했는지만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했는지도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사랑 이야기는 로마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한다.
황제의 욕망은 어디까지 개인의 일이었을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책의 2권 후반부에는 로마의 황제들이 등장한다. 오토 키퍼는 황제와 황실 여성들의 삶,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를 살펴본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은 이야기가 따라다니는 인물이 네로다. 책은 네로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서 그의 성생활과 주변 여성들의 다툼,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살펴본다. 이어 도미티아누스와 하드리아누스, 헬리오가발루스 등으로 이야기를 넓힌다.
황제의 사생활을 읽는 일은 평범한 사람의 사생활을 읽는 것과 조금 다르다. 황제는 제국의 최고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는 권력을 둘러싼 문제와 얽힐 수 있고, 개인적인 선택이 정치와 떨어져 있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 부분에 이르면 책의 앞에서 서로 떨어져 있던 것처럼 보였던 두 단어가 가까워진다. 욕망과 권력이다. 그리고 그 두 단어를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이 책이 마지막에 던지는 가장 큰 질문과 만나게 된다.
거대한 제국의 멸망을 하나의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
로마는 왜 멸망했을까. 사치 때문이었을까. 쾌락 때문이었을까. 성적인 방종과 도덕의 붕괴 때문이었을까. 오토 키퍼는 로마인의 지나친 성욕과 사치, 허영심이 제국의 쇠퇴와 몰락을 가져왔다는 설명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다고 욕망과 사치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과도한 욕망이 부른 결과’가 분명히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족성과 전통의 문제, 정복이 남긴 대가, 전쟁에서 패하게 된 시대적 요인, 경제의 모순과 한계, 종교와 정치 사이의 괴리도 함께 살펴본다. 그리고 끝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이 대목에 이르면 앞에서 지나온 수많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남성 중심의 가족에서 여성의 해방으로 움직이던 사회, 인간의 고통에 열광하던 원형경기장, 비너스를 숭배하면서 절제를 말했던 사람들, 화려한 목욕 문화를 즐기면서 스토아의 금욕을 이야기했던 로마인들. 사랑을 아름다운 시로 남긴 사람들과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황제들도 같은 제국 안에 있었다.
어느 하나만 떼어내 로마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로마 제국과 로마 성풍속사]가 성풍속에서 출발하면서도 결국 제국 전체를 바라보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마의 사랑과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가족이 보이고, 가족을 지나면 사회가 보인다. 다시 권력과 종교, 철학과 문학이 나타나고 그 뒤에서 거대한 제국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처음의 질문이 다시 남는다.
로마는 정말 쾌락 때문에 멸망했을까.
오토 키퍼가 보여주는 수많은 로마의 얼굴을 만나고 나면 그 질문에 처음처럼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워진다. 어쩌면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답을 얻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쉽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로마를 다시 질문하게 되는 데 있다. © 산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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