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오래된 폐서고에는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떠돈다. 대비전 궁녀 여리는 우연히 그곳에 들렀다가 이상한 사내와 마주친다. 귀신을 쫓아준다는 능엄주를 떨어뜨렸는데도 사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귀신이 아니었다. 세자 이호였다. 그런데 장차 조선의 왕이 될 세자의 취미가 범상치 않다. 귀신의 행방을 쫓는 것이다.
세자는 여리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어쩔 수 없이 내기에 응했던 여리도 조금씩 그 일에 빠져든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 귀신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두고 벌이는 조금은 기묘한 놀이였다. 하지만 어느 날 궁궐에 정말 괴물이 나타난다. 방울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천구(天狗).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의 내기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된다.
귀신이 썼다는 책을 읽으면 천구가 찾아온다
마침 세간에는 한 권의 책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환혼전(還魂傳). 소설의 제목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책에는 천구라는 괴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책을 둘러싼 소문이 수상하다. 누군가는 귀신이 쓴 책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사라진 뒷부분을 읽으면 천구가 찾아와 사람을 죽인다고 말한다.
괴담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궁궐에 천구가 나타난다. 방울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천구가 나타난 뒤 대비가 갑작스럽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증에 시달린다. 환혼전과 천구, 그리고 대비의 병. 세 가지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대비를 살리려면 그 비밀을 밝혀야 한다. 세자와 여리는 내기를 멈추고 한편이 된다. 그리고 미완성된 환혼전의 원본을 찾아 나선다. 누가 이 괴이한 책을 썼을까. 천구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대비에게 일어난 일과 환혼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김영미 작가는 하나의 의문 뒤에 또 다른 의문을 숨겨놓으며 독자를 세자와 여리의 추적 속으로 끌어들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괴물이 나타난다
[환혼전]의 미스터리가 더욱 흥미로워지는 순간은 소설 속 괴이한 사건과 실제 역사가 만날 때다. 세자 이호 역시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다. 훗날 조선 제12대 왕이 되는 인종이다. 인종은 조선 왕조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짧았던 왕이다. 그런데 그의 생애 전후에는 이상하리만큼 기이한 사건들이 이어진다.
인종이 세상을 떠나던 날 밤 경성에서 괴물 소동이 일어났다. 그보다 18년 전, 그가 아직 세자였던 시절에도 궁궐에 괴물이 출몰했다. 인종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도 궁궐에는 기이한 짐승이 나타났다. 마치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설정처럼 보이지만,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이다.
김영미 작가는 이 기록들 사이로 들어간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 남아 있는 기이한 사건들을 ‘환혼전’이라는 가상의 책으로 연결한다. 역사적 기록은 바꾸지 않으면서 기록과 기록 사이의 빈자리에는 작가의 상상력을 채워 넣는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또 하나의 추리가 시작된다.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에서부터 소설일까. 환혼전에서는 역사 자체가 미스터리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세자와 궁녀가 함께 사건을 쫓기 시작했다
수수께끼만큼 흥미로운 것이 세자 이호와 궁녀 여리의 관계다. 두 사람의 출발점은 내기였다. 세자는 귀신을 쫓는 자신의 취미에 여리를 끌어들이고, 마지못해 따라나선 여리도 점차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대비가 병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두 사람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긴다. 대비를 살리는 것. 그러려면 천구의 정체를 밝혀야 하고 환혼전의 비밀도 풀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던 궁궐을 함께 바라보기 시작한다.
세자라고 해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는 무게가 따른다. 더구나 사건에 얽힌 사람들이 자신의 혈육이라면 진실을 밝히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한쪽이 옳다는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결국 자신이 잃게 되는 것은 가족일 수 있다.
여리는 세자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궁궐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건을 추적하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의 시선과 감정을 이해한다. 이들의 관계는 화려한 신분 차이의 로맨스보다 ‘슬픔을 인식하는 이들끼리의 작지만 깊은 연대’에 가깝다. 귀신을 둘러싼 내기로 시작된 관계가 이제 같은 진실을 찾아가는 동행이 된다.
괴물을 쫓을수록 사람의 이야기가 보인다
환혼전의 초반을 움직이는 것은 호기심과 공포다. 폐서고에는 정말 귀신이 있을까. 천구는 무엇일까. 방울은 왜 울리는 것일까. 누가 환혼전을 썼을까. 대비의 병은 이 모든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단서가 하나씩 맞춰지면서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진다. 김영미 작가는 당시 왕실에서 잇따라 벌어진 기이한 재변을 그 시대의 비극과 연결해 바라본다. 그래서 사건의 진상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괴물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뒤에 감춰져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까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화려한 궁궐의 역사는 대개 왕과 왕비,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의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그들의 갈등 아래에는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승리 뒤에서 밀려나고, 상처받고, 결국 역사에서 지워져버린 사람들이다.
[환혼전]은 그런 사람들을 바라본다.
왕실의 미스터리가 한 꺼풀씩 벗겨질수록 이야기는 통쾌해지기보다 조금씩 서글퍼진다. 괴이한 사건의 전말을 알아낸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비극까지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귀신을 쫓던 세자는 무엇을 보게 되었을까 독자는 세자 이호의 미래를 알고 있다. 그는 훗날 인종이 된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뒤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환혼전]은 이미 기록되어 있는 역사의 결말을 바꾸는 대신 그 기록 앞에 하나의 이야기를 놓는다. 왕이 되기 전의 세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궐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을 겪으며 무엇을 보았을까.
처음의 이호에게 귀신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폐서고에 나타난다는 귀신을 쫓고 궁녀 여리와 내기를 벌이는 일에는 놀이 같은 즐거움도 있었다. 하지만 천구와 환혼전]의 비밀을 찾아갈수록 그가 마주하는 것은 기괴한 존재만이 아니다. 사람의 슬픔이다.
김영미 작가는 이 과정을 세자 이호가 훗날 ‘어진 임금’ 인종이 되어가는 준비와 연결한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추적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바라보는 경험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환혼전]이 모든 것을 무겁게 설명하는 소설은 아니다.
세자와 여리는 끊임없이 단서를 찾고,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면 새로운 의문과 마주한다. 독자는 두 사람과 함께 폐서고와 궁궐의 어두운 곳을 오가며 흩어진 단서를 맞춰가게 된다. 실록에 남은 역사와 작가가 만들어낸 미스터리가 서로 맞물리면서 끝까지 진실을 궁금하게 만든다. 그렇게 천구를 쫓아 궁궐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 상처받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잊혀간 사람들이다.
[환혼전]의 시작에는 귀신이 있다. 하지만 그 귀신을 끝까지 따라가면 결국 사람이 남는다. 그래서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마음에 남는 질문은 어쩌면 천구가 정말 존재했는가가 아닐지 모른다. 그 기이한 이야기 뒤에서, 누가 그렇게 오랫동안 잊혀 있었는가. [환혼전]은 귀신을 찾아 시작한 추리를 그 사람들에게까지 이어가는 역사 미스터리다. © 산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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